우리가 가진 ‘유교적’이라는 개념이 본래 공자의 사상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유교적’인 것들을 비판하고 지워내려는 시도 속에서도 이 책, <논어>는 꾸준히 읽히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다. 책을 읽은 후 나는 그 이유를 우리의 ‘유교적’ 개념이 (착각과 왜곡으로 뒤덮여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유교로부터 나올 수 있었던 하나의 문화, 하나의 규범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화, 그들의 생각은 어떠한 양식이나 규범에 구애되지 않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유교는 우리가 과거 따랐던 ‘유교적’이란 개념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그들의 지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유교의 뿌리에 위치한 <논어>를 해석해보려고 한다.
아직 ‘도(道)’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도’는 진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진리를 고귀한 가치로 여겼다.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는 진리에 대해 깊은 열망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음의 말을 통해 공자는 그것이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는 일만큼이나 누구에게나 기쁜 일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힌다면 그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온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면 공자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권유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만들어진 사회가 유교학을 최고선으로 두던 사회, 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가 제시한 최고가치가 ‘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조선이 중시하던 예도 아니고, 어떤 사회에서나 중요한 가치였던 음악(혹은 음악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기쁨)도 아니다.
사람으로서 어질지(仁) 않다면 예가 무슨 의미가 있고,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다면 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리는 기쁘기 위한 지향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은 매일매일 학문에 임했던 공자에게 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도를 지향점으로 두고 있는 공자지만 성취하기 어렵기에 ‘저녁에 죽어도 좋다’며 한탄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대신에 공자는 도를 그 자체로 두고 하루하루의 삶에서는 인(仁)을 강조한다. 어진 사람이 되는 일 또한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의지의 문제이다.
인이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인하고자 하면 곧 인에 이를 것이다.
도는 아무리 추구하려고 해도 알아내기 힘들지만 인은 진정으로 인하고자 한다면 닿을 수 있다. 비록 인의 경지에 다다르기는 힘들더라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그것을 조금씩 실천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어떤 것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도를 ‘권유’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그 추구 과정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는 인을 끝없이 ‘강조’한다. 공자는 도를 알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어질지 않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인이 과연 생활 속에서 추구해야할 가치가 맞는지, 또 그것을 위한 삶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논어>는 많은 부분을 이에 대한 설명으로 할애하고 있었다.
군자는 넓고 평탄하며, 소인은 항상 근심한다.
어질지 않은 사람은 오랫동안 빈곤한 상황에도 있지 못하고, 오랫동안 안락한 상태에도 있지 못한다. 어진 사람은 인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공자는 인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평탄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안정감은 외부적인 상황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지속적이다. 인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든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이다.
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고서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게 되고 바르게 될 것이다.
<서경>에서는 ‘효로다, 부모님께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롭게 지내어 정치에 영향을 준다’고 했으니, 이것 역시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찌 벼슬해서 정치하는 것만 정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공자는 인에 이로운 측면 또한 있다고 봤는데, 나는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인의 이로움을 찾아볼 수 있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인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회적 규율과 같은 부정성, 즉 ‘~할 수 없다.’가 사회의 주된 가치가 되어선 안 된다. 규율에서 엇나가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인과 같은 긍정성, ‘~하면 좋다.’를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것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점은 규율과 달리 인은 누구나 그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공자는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누구나 각자 작은 부분에서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임방의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좋은 질문입니다.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검소한 것이 낫고, 상례는 의례를 완벽하게 행하는 것 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날 효라고 하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개나 말도 모두 기르는 일이 있으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하면 좋다’로 말하긴 했으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슬픈 일에는 슬퍼하고, 기쁜 일에는 감사하는 것은 특정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어느 정도 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집중하는 것에 역점을 두면서 공자는 인을 실천할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을 단속하면서 실수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인의 실천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공자는 인의 실천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에 대해 많은 말을 남겼지만, 나는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의 선한 면을 믿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자신 안에 자신을 단속할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자신이 가진 인의 실천 능력은 발휘조차 힘들 것이다.
공자께서 다른 사람과 노래를 부르실 때 그 사람이 잘 부르면, 반드시 다시 부르게 하시고 나서 같이 부르셨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남에게서 인을 배울 수도 있다. 인을 실천할만한 능력의 크기나 범위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것이 고정되어있지는 않다. 우리는 그것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넓혀나갈 수 있다. 노래를 잘 부르면 다시 보고 같이 하듯이, 어진 일을 보면 다시 보고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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