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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ation/책

구토 - 그 틈 사이에서

가끔 내 학창시절을 돌이켜볼 때 신기한 것은 내가 스스로를 학생이라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같은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명백한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떨쳐낼 수 없는 괴리감에 몸서리를 쳤다. 나의 위치가 ‘나’라는 존재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은 날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누군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올 때 만약 내가 '저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24살 대학생입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뭔가 틀려버린 느낌이 든다. 그보다 나는 잠들기 전 머리맡에 있는 시집과, 그 시집을 읽으며 끄적였던 짤막한 메모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 조차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렇게‘나’라는 존재의 실체에 대한 물음을 품은 채 읽게 된 책이 <구토>였다. 주인공 로캉탱이 소설 속에서 느끼는 구토감은 어딘가 내가 느껴왔던 그 괴리감과 닮은 데가 있었다. 내 과거나 신분 같은 것이 내 존재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공감이 갔다. 그래서 그와 함께 고민했다. 날 둘러싸고 있는 말이나 몸뚱아리 같은 껍데기를 벗겨낸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로캉탱의 깨달음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그 실체 자체가 구토라고 말한다. 언제나 우리 몸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애써 숨겨왔던, '토‘ 말이다. 절망적이고 결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말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나를 힘들게 했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가까스로 <구토>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절망적인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로캉탱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오히려 살아가는 것은 오직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싫증과 증오감을 느낌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과 함께, 처음부터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자유를 느꼈다. 여기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로캉탱 스스로 그 자유가 죽음과 닮아있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묘한 공감이 일었다. 그러나 동시에 강한 의문점을 찾아냈다. 죽음 그 전에는? 죽음과 진정한 자유가 한 쌍이라면 삶은 무엇과 한 쌍일까?

나는 그 답이 로캉탱의 마지막 결단에 있다고 생각했다. 로캉탱은 전기를 집필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했다. 과거의 장면들 대신 현재의 장면들을 마주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런 것도 의미 없다 해도 삶 속에서 현재에만 집중한다면 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과도 같은 자유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 내 삶에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결론 내렸다. 얄팍한 호의라면 아무렇게든지 주며 살아가도 실존적인 ‘나’는 문제 없다.(자유)그러한 삶은 아무 의미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이 없는 삶. 죽음 근처에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며 사는 삶에서는, 의미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의미 없이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삶을 살아있게 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데는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덕이 크다."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구토>는 존재의 실체에 어떤 의미심장함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잠들기 전 머리맡의 시집과, 내 메모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값진 일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 사이에서, 커튼 틈 사이로 비치듯 언뜻언뜻 실루엣을 드러내는 무엇인가를 엿보곤 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을 자신 있게 ‘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