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그들을 배경으로 밀어넣었나
<4천원 인생>의 주제의식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빈곤 노동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빈곤노동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여태 실로 다양한 접근으로 우리는 노동문제와 관련된 무수한 데이터와 사례들을 살펴보고 현재의 제도를 분석해왔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항상 공허한 외침에 그쳤다. 저자는 그것이 스스로 문제를 알기 이전에 느끼지 못한 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그 간단명료한 생각으로 저자는 비정규직 시장에 뛰어들어 그 귀퉁이에서 노동일기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그 일기는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알고만’ 있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들의 삶을 체험하며 그들의 아픔을 느낀다면 괜찮은 것일까?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걸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책은 나에게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쳐서는 “<체험 삶의 현장>식의 위선”에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한 순간 한 순간마다 그저 배경에 머물러있는 그들과 우리가 아직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서로의 사이에는 아직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글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매일매일 마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해왔는지, 어째서 그렇게나 잔인한 외면이 그렇게도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는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물론 그 목적은 우리 외면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정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를 우리가 뻐꾸기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 하나하나 배경처럼만 존재했던 비정규직의 아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낙수효과는 작동했다
한때 우리 정치는 물론이고 해외 정치까지도 낙수효과를 믿었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이는 얼마가지 않아 이론적 허점을 드러냈고, 이제는 경제학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완전히 폐기되었다. 우리나라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이론을 제창해왔다. 사실 일개 노동자라도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우리 모두 잘 살 것이라는 희망은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비록 지금은 대자본에 집중된 부가 자연스레 분배될 것이라는 환상을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나는 낙수효과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부 대신에 비인간성의 확산으로 나타났다. 인간적인 노동을 추구하지 않는 노동풍토가 대기업에서부터 그대로 하청으로, 또 외주로 흘러 흘러 내려온 것이다. 대기업 임원은 직원에게 성과만을 요구하고 성과를 올리는 데에 혈안이 된 직원은 하청의 납품단가를 후려친다. 그렇게 하청기업의 경영진에게서 비정규직을 인간답게 볼 여유는 사라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생각할 기회가 차례차례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를 부품으로 여기는 시선은 정부ㆍ기업이라는 거시권력에서부터 감독관, 매니저, 손님이라는 미시권력에까지 완벽하게 확산되어 노동자를 포위한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노동자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기대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그들까지도 스스로를 부품으로 보는지도.
돈 벌어서 먹고살긴 하잖아?
그렇게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시선이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본가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한 만큼 받고 싶어한다’는 인간의 보상심리을 교묘하기 비틀어버림으로써 그 일을 수행했다. 일차적으로 그들은 저 보상심리를 최저임금이라는 사회적 합의(!) 안에서 채워주고, 최대 효율로 노동자를 사용하기 위해 이 명제에 조금 살을 붙인다. 인간의 보상심리를 충분히 채워주겠다는 듯이 ‘인간은 일한 만큼 지급받기만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다. 이 구호가 낙수효과에 의해 퍼지면서 보수를 받는 노동자가 일을 어떤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는 중요치 않아지기 시작한다. 마치 전기나 기름만 있으면 작동하는 기계처럼 말이다. 코드를 꽂은 기계가 일할 때에 아무도 기계를 신경 쓰지 않듯이, 보수를 받은 노동자가 죽도록 일할 때에 아파하는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사이에 기계는 고장 나지 않을 만큼만 일하도록 설계되어있지만 사람은 고장 나지 않을 만큼의 일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잊혀진다. 보수를 받은 이상 노동자는 턱 끝까지 숨이 차도 꾸역꾸역 일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기분, 그들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는다. 지급받기만 하면 된다는 구호 아래, 일한 만큼은 대우받을 권리, 또 일한 데에서 만큼은 치료받을 권리는 욕심이 되어버린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아픔을 느끼기에 우리는 그들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너무 많이 잊어왔다. ‘배운 만큼, 일한 만큼 받으니까 그런 취급을 받아도 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런 일을 해야지, 어떻게 다 대기업 다니고 그러겠어.
상대적으로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익히기 쉬운 비정규직 업무를 맡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배우기 쉬운 일을 해야한다는 말이, 누군가는 인간적인 처우를 못 받으며 고통받아도 된다는 말로 연결되어선 안 된다. 사실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근무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일이 편해지기 바라지도 않는다. 대기업을 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대신에 사장 눈치, 감독관 눈치 덜 보면서 일하고 싶어 한다. 그들의 몸은 분명 단순노동을 하는데도 머리는 각종 계산을 하느라 바쁘다. 사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계산, 가게 매출을 위한 계산이다. 다시 말해 ‘삭제’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전전긍긍이다. 개인의 지식이나 기술의 수준이 곧바로 인격적인 부족함으로 치환되어 그들의 가치를 매긴다. 그들의 가치는 누구로도 대체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기분과 처지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에 빠진 그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고통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한다. ‘누군가는 그런 일 해야지’라는 말 뒤에는 우리는 그들이 내가 겪을 수도 있던 고통을 그들이 겪는 모습을 보면서 은근슬쩍 안도하는 우리 모습이 있다. ‘나라면 저런 일 못했을 텐데. 다행이야.’라며 그들을 격리한다. 어느 지점에선가 노동자는 고통받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비정규직? 걔네 @!#$%^(*&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면서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알게 모르게 배타성을 가지기도 한다. 가게 종업원이 불친절해서 불쾌했고, 학교 비정규직 노조가 파업을 해서 밥을 못 먹어서 불편했기 때문에 말이다. 각자의 경험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배타성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너네가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곱게 보겠냐’는 식의 사고방식이 머릿속 깊숙이 자리한다. 비인간적 노동 현장은 매몰되고, 심지어는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더 이상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쓸데없는 오지랖이 돼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들은 왜 화를 내는가’이다. 우리가 겪은 불쾌한 경험은 물론 우리 탓이 아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그들의 탓일까? 그들은 시스템에 대응할 힘이 없다. 그들은 참아보지만 불쑥불쑥 화가 날만큼 힘든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 파업이라는 최후의 몸부림을 한 것뿐이다. 빈곤 노동을 부추기는 시스템 앞에서 당신과 그들은 공동의 피해자일 뿐이다. 당신이 불편하고 불쾌한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면, 아마 거기에 공감의 길이 있지 않을까.
인간다운 정규직, 인간다운 비정규직, 인간다운 사회
이쯤 되면 ‘내가 어떻게 해!’하는 소리가 나올 때도 됐다. 푸념할 만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인이 아닌 한 개인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하다. 거대한 변혁은 오직 사회 전체가 움직일 때에만 일어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변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분명 개인이다.
굳이 거대한 변혁의 발로라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눈길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책에서 그려낸 A마트의 손님들은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나. 모두가 먹고 살기 팍팍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떻게 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가슴이 깝깝하다면, 그래서 인간미를 좇고 싶다면 이제라도 마트에서, 식당에서 비정규직의 얼굴을 살펴보자. 거기서 어떤 아픔이라도 느꼈다면 된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순간 당신은 그 아픔을 당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전달해줄 테니까. 그리고 그 아픔이 쌓여 가면 당신은 언젠가 작은 목소리라도 내기 시작하지 않을까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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