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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ation/영화

올드보이 - 개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오이디푸스’

라는 이름은 영화나 문학의 비평에서 많이 들어본 적 있다. 비평가들은 대체로 프로이트의 욕망과 억압에 대한 이론과 함께 오이디푸스를(정확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인용했고, 나는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 대강 오이디푸스의 플롯이나 개념만 찾아봤었다. 애초에 찾아 읽어볼 정도로 신화에 관심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지루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 읽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신화라는 추상적이고 원형적인 이야기를 극으로 만들어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세심한 디테일을 추가해 더욱 흥미롭게 재구성 되어 있었다. 부담 없이 책장을 넘겨가면서, 왜 그토록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은 스토리의 해석에 활용되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부터가 책을 읽으면서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나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 <올드보이>가 자연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올드보이>는 한 두 순간에서 떠오른 게 아니라 글을 읽는 내내 나를 쫓아다녔는데, 그 이유는 아마 ①자기 자신의 죄를 모르고, ②누군가의 말에 따라 ③느닷없이 벌어진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④결국 자신의 죄가 재앙의 근원임을 알고 자신의 신체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또 ⑤그 과정에 근친상간이 깊게 관여돼있다는 점에서 현대판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오이디푸스와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 둘의 공통점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다는 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둘이 그러한 과정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인지 알지 못하며, 오히려 남을 찾아내는 과정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도시에 역병의 저주를 가져다 준 자를 알아내고 단죄하려 하고, 오대수는 자신을 15년 동안 가둔 자를 알아내 단죄하려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부정한 짓을 저질러 테바이에 저주를 내리도록 한 죄를 오이디푸스 자신이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대수는 15년 동안 자신이 갇혔던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극을 뒤집어 놓는 강력한 반전 도구로 사용되면서 관객을 더욱 몰입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극 중간에서 오이디푸스와 오대수가 그들의 파멸을 멈출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스스로 파멸을 자초한다는 점에서 더욱 강해진다. 둘이 그 결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긴 했으나, 둘과 근친상간 관계를 맺은 이오카스테와 미도는 완전한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둘을 만류한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 어리석다거나 미련하다고 보기 보다는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이 비극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이 파국으로 가는 길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다름 아닌 인간 본연의 욕구,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욕구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진 근본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두 주인공을 보면서, 어떻게 그들을 탓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전반적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작품 사이에서 몇가지 요소에서 2500년의 간극을 찾아볼 수 있었다. 내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누가 주인공을 파국의 길로 인도하는가.’였다. 두 주인공에게 파국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아폴론/이우진으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폴론은 오이디푸스에게 신탁으로서 파국의 길로 이끌고,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느닷없는 전화를 걸면서 파국의 길로 이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 왕>가 쓰여진 사회, 그리고 <올드보이>가 쓰여진 사회의 차이가 드러난다. 인간이 겪는 시련의 원인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있을 때 그 비극성이 강화된다. 소포클레스는 그 어쩔 수 없는 것을 운명 혹은 신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신과 함께’ 생활했던 그리스 사회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원활한 신탁과 그에 따른 제물의식, 혹은 “어떠한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와 같은 대사에 드러나듯이 그리스 시대는 인간이 신을 어찌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언제나 곁에 존재하는 실존인물처럼 신을 생각하고 대했던 것이다. 반면에 현대사회에서 신은 사회의 주체로 생각되지 않는다. 신은 이제 의식체계 뒤로, 혹은 밑으로 밀려났다. 신과의 소통은 오직 개인적인 영역일 뿐, 더 이상 사회적ㆍ보편적 영역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신에 박찬욱 감독은 이우진이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통해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그려냈다. 오대수에게 고통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과거 오대수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이우진은 가해자인 동시에 범죄자이다. 때문에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대수는 “복수심이 이제 아예 내 성격이 되어버”린 괴물이 되었지만, 그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다.

결국 오이디푸스와 오대수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인도하는 대로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자신의 과거였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면서 비극성은 더 커진다. 그러나 천하의 패륜아이자 살인귀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둘에 대한 시선은 다르다. 누가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끌었는가하는 차이는 그 사회의 시선을 보여줬다면 파멸에 이른 주인공을 대하는 시선의 차이는 인간에 대한 지은이의 태도를 보여준다.

소포클레스는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를 통해 죄를 지은 인간인 오이디푸스에게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비판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비극적인 운명에도 불구하고, 구제의 여지는 없다. “신들께서 미워하는 자”,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바람은 뻔뻔하고 구차하게 그려질 뿐이다. 비운의 주인공은 일종의 판결을 맞이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찬욱은 최면술을 통해 오대수에게 희망을 남겨둔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자(미도)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잊게 해달라는 오대수의 글을 읽은 최면술사는 "솔직히 내가 그쪽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죠. 근데 말이죠, 이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움직였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비록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최면이 제대로 통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편지의 마지막 문장,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에 응답한 것만으로 감독의 태도는 충분히 드러난다. 그리고 감독은 마지막 씬으로 오대수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소포클레스가 이제 오이디푸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까지 이 세상 누구도 행복하다고는 부르지 마라”라는 코러스로 극을 마무리한 것과 달리 박찬욱은 아무 말 없이 오(이)대(푸)수만을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말한다. 감독 스스로 밝혔듯이, 이 이야기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개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아이들은 내게서 데려가지 마십시오”라는 오이디푸스의 말에 우리는 크레온의 말처럼 “모처럼 손에 넣으신 권력도 평생을 따르지는 않지요”라고 말해야하나, 아니면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오대수의 말에 최면술사처럼 마음을 움직여야 하나. 그리스 시대와 달리 인권에 대한 개념이 우리 의식에 뿌리 깊이 내리하고 있는 지금이라 할지라도 선택은 힘들기만 하다. 우리가 삶의 저편에 이르기 전까지는 진정 행복을 말할 수 없는 존재라면, 나는 그래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윤리라는 게 아직도 이상과 선을 말하는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