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ry/복잡한 사회

프로불편러 담론(2017)

DanK 2019. 6. 17. 01:31

1. ‘프로불편러’의 등장

  대한민국 인터넷이 다양한 사회 문제에 있어서 공론화의 장(場)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 동안 우리는 PC 통신 채팅방에서부터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또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저런 것까지 따지고 드느냐.”라던가, “이렇게 이야기해봤자 뭐해.”하는 시선과 마주해야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이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로 응축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프로불편러’라는 용어는 어떤 현상이나 표현의 아주 지엽적인 부분만을 조명하고 확대해석해 사회적인 문제로 공론화시키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언니,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말과 함께 감정에 호소해 여론몰이를 하려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생겨났다. 특히 지난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이후, 여초(女超)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국사회 곳곳에서 성 차별적 표현이나 제도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자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래 ‘프로불편러’가 어떤 현상이나 표현을 보던 그 속에서 전문적(‘Pro’)으로 ‘불편’함만을 찾아다니는 사람(‘er’)을 가리키는 만큼 ‘암 걸린다.’는 말이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모독하는 표현으로 보여 불편하다는 네티즌부터, 드라마 속 음주장면이 청소년에게 음주를 권장해 불편하다는 네티즌까지 ‘프로불편러’라고 비판 받는 경우는 다양하다. 문제는 이를 두고 한 측에서는 자신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공유하면서 우리 사회 속에 숨어있던 문제점을 찾아나가는 바람직한 태도로 여기고, 한 측에서는 무분별한 꼬투리 잡기, 혹은 사회에 대한 단순 불평으로 여긴다는 데에 있다. 물론 이는 <그림 1>과 같이 자신이 느낀 불편함에 대한 여러 의견을 공유하면서 우리사회를 돌아보려는 경우도 있고, <그림 2>와 같이 자신만이 느낀 불편함으로 어떤 현상을 맹렬히 비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태도나 목적이 어떻던, 지금의 대중들이 ‘불편함을 표출하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 극명한 시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왜 지금 대중은 불편함을 말하는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왜 그러한 불편함을 거부하려하는가.

 

2. 불편하거나, 혹은 그 불편함이 불편하거나

2.1. 시대의 충돌

서구 열강들이 몇 백년에 걸쳐서 조심스럽게 경제력과 민주주의를 키워왔던 것과는 달리,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50년도 채 되지 않아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민주화를 이뤄냈다. 눈부신 성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때문에 지금 한국사회는 군부독재 치하에서 규범과 질서를 지키는 데에 집중했던 규율사회와 민주정부 수립 이후의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려는 자율사회가 충돌하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충돌이 완전히 세대 간의 갈등만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규율을 지키면 보장 되던 ‘보통의 삶’이 모두 무너져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까지 ‘보통의 삶’이라는 표준적인 모델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저임금, 비정규직 취업이 절반 이상인데도 노동 운동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미혼남녀의 절반 이상이 맞벌이, 가사노동 분담을 원한 지는 1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0~14세 자녀를 둔) 맞벌이 가구는 약 30%, 가사분담률은 16.5%로 OECD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문제 제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낯선 일인가. 사회가 자율화되고 교육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우리사회의 어딘가에 숨어있던 불편한 구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그들은 문제를 명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마음 한 켠이 불편했던 순간을 공유할 뿐이다. 이는 문제제기를 꺼려왔던 규율사회의 흔적이다. TV 예능프로그램을 보다가 무언가 불편한 감정을 느껴도 누구나 자주 하는 말이기 때문에 직접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부담을 느낀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규율에서 벗어나 소수자가 되는 일에 사람들은 아직 서툰 것이다. 심지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언어라면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볼 시도조차 한 적이 없어 자신이 왜 불편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형/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제기를 하는 당사자조차 문제라고 ‘주장’을 하기엔 너무 두려운, ‘설명’을 하기엔 이해가 부족한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되었지만, 소수자를 이해하거나 자처하는 사람은 여전히 적다. 나만 그런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소수가 되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회의 다수에게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감정에 기댄 확대해석이고, 대책 없는 불평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에서 소수자가 제시하는 사회의 불편한 시각이 가볍게 무시당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규율사회에서는 우리 모두의 문제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모두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전무하기 때문에 사회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적대시한다. 일부가 서툴게나마 불편한 시각으로 우리사회를 바라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빈틈을 발견해 그 사람 머리에 ‘프로불편러’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다.

 

2.2. 건강하고 긴 삶

그렇다면 ‘프로불편러’라는 말은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규율사회의 흔적일 뿐일까? ‘프로불편러’를 외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라는 우리사회의 새로운 규율을 지키려는 걸까?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규율사회에서와는 달리, 우리들은 스스로 사회 곳곳에서 제기되는 불편감을 ‘잡음’으로 여긴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사회가 맞닥뜨린 현실이 있다. 취업난, 경기침체, 물가상승은 청년들을 ‘N포세대’로 만들었고, 중년층을 ‘고개 숙인 아버지’, ‘한숨 쉬는 어머니’로 만들었다. 기성세대가 성취했던 많은 것들을 청년층은 포기하고, 중년층은 단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회가 인정하는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살기에도 버겁기 때문에, 그들은 끝없이 되뇐다. ‘긍정적으로 보자, 긍정적인 면만 보자.’ 모든 현대사회의 주체가 그렇듯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주체는 한병철이 말한 ‘자기경영’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사회에 울려 퍼지는 ‘할 수 있다’는 구호는 긍정성의 과잉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긍정성으로 사회를 덧칠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할 수 있다’는 구호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더 격렬하게 부정성을 사장시킨다. 부정성을 지워내는 게 그 구호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거짓된 긍정성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동안, 사회 문제를 비판하고 연대하는 길은 요원해졌다. 사회에서 겪은 폭력적인, 혹은 불합리한 경험을 작은 소리로 털어놓을 뿐 비판하지 않고, 공감해달라고 할 뿐 같이 싸우자고 하지 않는다. “이거 나만 불편해?”하고 시작하는 글들은 당당하게 그 본질적인 부정성을 지적해내지 못한다. 사회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거대한 부정성은 뒤로 하고, 거기서 오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 그 사소한 부정성에 주안점을 둔다. 때문에 성 차별적인 자막을 내보낸 TV프로그램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공유하는 데에 그친다. 당연하게도 TV프로그램을 제외한 사회는 여전히 긍정성으로 덧칠되어진 채로 남는다.

문제 제기자만 본질적인 부정성,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네티즌 또한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부정성을 외면하려고 몸부림 쳤다. ‘프로불편러’는 그 몸부림의 결과이다. ‘프로불편러’가 꺼내놓은 불편함들이 어디서 오는지 보자. 여성차별, 지역차별, 성소수자혐오 장애인차별 같은 혐오 감정이 그 중심에 있다. 이것들은 우리 일상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정치/시사 문제와 달리 그 표적은 대중들 자신이다. 그러나 긍정성으로 사회를 덧칠하려는 이들은 혐오, 경멸, 차별이 가진 부정성에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한 것을 자신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우리 사회 한 복판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삐져나온 부분만을 보고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대신에 ‘건강하고 긴 삶’에 집중한다. 우리사회에서 자신만의 목적이나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한가한 소리가 되어버렸다. 포기하고 단념한 목표만이 그들 앞에 있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사회가 나아가는 데에 관심을 쓸 겨를은 없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형을 “말종인간”이라고 부르며 맹렬히 비판했다. 우리는 “동경의 화살을 더 이상 자신의 너머로 쏘지 못하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누군가가 일상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까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지만 거기에 조소를 보낼 뿐이다.

 

3. 불편함을 넘어서 분노로

 

현실의 벽에 부딪혀 포기하고 단념한 끝에 세운 작은 목표조차 이루는 데에 애를 먹는 사람들에게 사회를 생각하라는 이야기는 무리한 요구일 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옥죄며 살아가느라 항상 지쳐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 모바일 시대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이 느낀 불편한 감정을 접한다. 이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 앞에 선다. ‘프로불편러’의 소행으로 취급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말이다. 끊임없이 자기계발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도 우리는 지하철에서 인터넷 기사를 보고, 인터넷 댓글을 본다. 마음의 여유만 되찾는다면 우리는 남는 시간에 얼마든지 남과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달려나가는 것이 사회의 미덕이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 앞에 모두가 몰두해야할 공통의 과제는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서 여자를 무시하고, 저학력자를 무시하고, 특정 지역인을 무시하는 크고 작은 파시즘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이라도 붙잡고 관심을 갖는 것이다. 소수자들과 유대감을 공유하고 우리 사회 이면의 부정성과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스테판 에셀은 ‘불편’을 넘어서 ‘분노하라’고 외쳤다. “참여하는 투사”만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다.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지게 하는 것은 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조류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생겨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로불편러’라고 비판 받는 경우에 그들은 자의적인 감정만으로 문제를 단정 짓고, 문제의 본질보다는 그 현상 자체만을 비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분노는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참여의 의지에서 생겨”나야 한다. “Cheer Up” 가사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다짜고짜 박진영을 욕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그 가사가 한국사회의 어떠한 면을 비추고 있는지 정확히 짚어내고 그것과 맞서기 위한 연대로 나아가려 해야 한다. ‘프로불편러’가 제시하는 불편함은 한 사람이 느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의 순간 뒤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편함을 넘어서야 한다. 불편함을 느끼게 한 일에서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고 개선의 의지를 갖게 됐다면, 우리는 참여해야한다. 분노해야 한다.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익명제보자), “#12467번째 포효”,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 2015.11.08, https://www.facebook.com/koreabamboo/posts/417987888404530, (2017.07.09)
“프로불편러 언냐들 이거 나만 불편해?”, BAE, 2016.05.15 http://blog.naver.com/stardom1227/220710435724, (2017.07.09)
「[weekly chosun] 나는 몇 점짜리 신랑·신부감?」, 《조선일보》, 2008.09.0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05/2008090501165.html, (2017.07.09.)
「양성평등 아직 갈 길 멀다… 의식변화 선결돼야」, 《국민일보》, 2017.03.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980105&viewType=pc, (2017.07.09.)
프레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민음사, 2004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임희근, 돌베개, 2011